
얼마 전 다녀온 전시회에서, 수많은 전시와 자극들 사이로 제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종이를 별미로 삼는 염소가 삼키지 못할 한 권의 책." 참으로 낯설고도 매력적인 비유였습니다. 무엇이든 꿀꺽꿀꺽 잘도 삼켜내는 탐욕스러운 염소조차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는, 그 묵직한 질량의 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문장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오니, 문득 깨달음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 나 역시 수많은 영감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스크랩하지만, 정작 내 안에서 소화시키지 못하면 결국 다 휘발되어 버리겠구나.'
우리는 참으로 부지런히 수집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서의 각종 스크랩 목록과 사진첩은 매일 새로운 정보와 영감들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릅니다. 멋진 문장을 보면 메모장에 복사해 넣고, 감각적인 전시장에 가면 눈으로 음미하기 전에 카메라 셔터부터 누르기 바쁩니다. 나중에 다시 꺼내어 보겠다는 막연한 다짐과 함께 말이죠. 마치 종이를 별미로 삼는 영리한 염소처럼, 세상의 모든 텍스트와 이미지를 '저장 버튼' 하나로 내 취향의 일부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모아둔 수천 개의 조각 중, 온전히 제 안에서 녹아들어 저만의 시선이나 체화된 감각으로 남은 것은 과연 몇 개나 될까요.
오랜 시간 전시를 보거나 무언가를 관찰한 뒤에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수집'하려 애쓰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훌륭한 영감과 아름다운 오브제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 삶의 맥락에 맞게 꼭꼭 씹어 삼키고 소화할 '고요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결국 휘발성 메모리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스크랩 버튼을 누르는 1초의 시간으로는 결코 타인의 취향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삼키지 못해 명치끝에 얹혀있는 과도한 지식과 정보들은, 층간소음만큼이나 우리의 기력을 빼앗고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또 다른 소음이 될 뿐입니다.
염소가 단숨에 삼키지 못할 그 한 권의 책은, 어쩌면 가볍게 소비하고 넘겨버릴 수 없는 '진짜 사색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천 장의 사진을 찍고 수백 개의 링크를 긁어모으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사물을 마주하더라도 그것을 내 삶에 빗대어 깊이 소화해 내는 일입니다. 많이 보는 것보다 한 번 깊게 멈춰 서서 되새김질하는 것. 저장 강박에서 벗어나,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영감만을 골라 천천히 호흡하는 것이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안식의 형태였습니다.
오늘부터는 갤러리에 쌓여가는 사진첩의 용량을 조금 비워내려 합니다. 무언가를 잊어버릴까 두려워 끊임없이 스크랩하는 대신, 조금 휘발되더라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대상과 온전히 눈을 맞추어보려 합니다. 숱한 정보의 바닷속에서 제 마음이 도저히 그냥 삼켜버릴 수 없었던, 오래도록 멈춰 서서 소화시켜야만 했던 '단 한 권의 책' 같은 순간들만 남겨두는 것. 그것이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저만의 취향을 가장 선명하게 지켜내는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