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오브제] 숫자가 사라진 자리, 취향이 시작되는 순간

by sstones 2026. 2. 10.
반응형

단순한 오브제

 

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백화점, 수많은 브랜드와 코너 사이에서 발길을 멈추게 한 물건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볼 때 한눈에 들어오는 쨍한 노란색.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질감이 참 묘하더군요. 불규칙한 점토처럼 우둘투둘하고 거친 표면이 빛을 머금어 따뜻한 입체감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시계, 숫자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시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주인에게 시간을 알려줄 생각은 애초에 없어 보였습니다. 시계 본질이 '정보 전달'에 있다면 명백한 불량품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무심한 당당함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아까 옆에서 보았던 둥근 버섯 조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빛을 내는 효율보다,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는 모양새만으로 공간의 온도를 바꾸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도구가 아닌 '오브제'가 된다는 것

우리는 언제부터 물건의 기능을 따지기보다, 그 물건이 주는 '기분'을 먼저 살피게 된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오브제(Objet)'라는 조금은 낯선 단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20세기 초,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물건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건 마르셀 뒤샹의 변기였죠. 화장실에 있으면 '도구'이지만, 전시장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감상의 대상'이 됩니다.

숫자가 없는 시계도 그 궤를 같이합니다. "지금 몇 시야?"라는 기능적인 질문을 차단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물건의 색감과 형태, 그리고 그것이 내뿜는 아우라를 온전히 바라보게 됩니다. 쓸모를 포기하는 순간, 비로소 예술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복잡한 공부는 제가 할 테니, 여러분은 그저 이 변화를 마음껏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숫자가 없는 시계를 사고, 전구보다 갓이 더 큰 버섯 조명을 들이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를 '효율의 지옥'에서 잠시 건져내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 거실이 갤러리가 되는 짧은 순간

한번 상상해 보세요.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어두운 거실. 벽면을 장식한 건 정확한 숫자를 깜빡이는 디지털시계가 아니라, 부드러운 노란색 덩어리 같은 오브제 시계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은은한 빛을 머금은 버섯 조명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숫자에 쫓기며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이 '기능 없는 물건들'은 휴식의 신호탄이 됩니다. "지금은 몇 시인지 몰라도 돼. 그냥 이 질감이 주는 낯선 감각에 잠시 집중해 봐"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오브제란 건 거창한 게 아닙니다. 내가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그 물건이 내 공간의 공기를 바꾸는 순간, 평범한 소품은 비로소 나만의 오브제가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에서 주워온 조약돌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쓰던 낡은 라디오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입니다.

당신의 눈에 머문 노란색

백화점에서 마주친 그 노란 시계는 제게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1분 1초를 다투며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아주 귀여운 반항처럼 보였거든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방 안에도 기능을 잃었지만 여전히 시선이 머무는, 자신만의 오브제가 하나쯤 있으신가요? 혹은 오늘 제가 마주친 노란색처럼, 낯설지만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촉감을 가진 물건이 있나요?

만약 없다면, 이번 주말엔 가까운 소품샵이나 백화점, 시장 등을 거닐며 '쓸모없는 예쁜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숫자가 없는 시계처럼, 가끔은 목적 없이 길을 잃어보는 것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오늘 밤, 거실의 큰 전등을 끄고 작은 조명 하나만 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놓인 물건들의 그림자를 가만히 관찰해 보세요. 그 순간 여러분의 공간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개인 갤러리가 될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