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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나만의 방식

by sstones 2026.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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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를 적어두는 일

 

머릿속 도서관의 책들이 조금씩 빛이 바래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 속에서, 어제 본 영상의 결말이나 며칠 전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조차 가물가물해지곤 합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의 뇌가 더 중요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난 일들을 뒤로 미루어두는, 지극히 당연하고 너그러운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가는 기억의 옷자락을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대신, 조금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제 시선이 잠시 머물렀던 '찰나의 순간'과 그 곁에 있던 '사물'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기록해 두는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진짜 선명한 기억은 뇌의 논리적인 정보 칸이 아니라, 우리가 통과해 온 구체적인 '상황'이나 만지작거리던 '물건'에 깊숙이 스며들어 살아갑니다. 머리로 외운 활자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흩어지지만, 손끝에 닿았던 거친 감촉,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눅눅한 흙내음, 혹은 낯선 광장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던 옛 노래 한 소절 같은 사소한 감각들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단순한 텍스트의 나열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흡수된 공기와 분위기라는 보이지 않는 그물망에 단단히 매달려 있습니다.

 

무심코 서랍을 정리하다가 구석에서 발견한 낡은 영수증 한 장, 혹은 오래전 여행지에서 챙겨 온 조약돌 하나가 아주 좋은 예가 되어줍니다. 지갑 한구석에서 구겨져 있던 빛바랜 영수증에 찍힌 흐릿한 날짜와 장소를 보는 순간, 잊고 지냈던 그날의 차가운 밤공기와 마주 앉아 나누었던 실없는 농담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피어오릅니다. 또, 매끄러운 조약돌을 손바닥에 쥐고 가만히 굴려보는 순간은 어떤가요. 신기하게도 그때 정수리를 내리쬐던 뜨거웠던 햇살과 비릿한 바다 내음, 그리고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오던 누군가의 맑은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밀려옵니다. 아주 사소하고 볼품없는 물건이나 우연히 마주친 상황들이, 굳게 멈춰있던 기억의 태엽을 다시 감아주는 훌륭한 '책갈피' 역할을 해내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기록한다고 해서 매일 밤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써 내려가는 거창한 일기장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수첩 한구석이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툭 던져놓는 몇 글자의 묘사면 충분합니다. "오늘 점심에 마신 커피는 유독 썼다"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처음으로 겨울 냄새가 났다" 같은 아주 짧은 찰나의 감각이면 완벽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일상이라는 책갈피 사이에 끼워두고 싶은 잊지 못할 '순간의 조각' 하나쯤은 있으신가요? 거창한 문장이 아니어도 좋으니, 오늘 밤에는 오직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짧은 감각의 단어들을 메모장에 가만히 남겨보시면 어떨까요. 훗날 어느 지친 하루의 끝에 그 짧은 문장을 다시 읽어 내리는 것만으로도, 무채색으로 희미해졌던 여러분의 풍경들이 다시금 다정한 원색으로 눈부시게 살아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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