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종종 모니터 너머의 세상과 내 현실의 속도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 공간에 고전 영화 속 조연들의 의상이나 옛날 뷰티 트렌드 같은 패션 지식들을 부지런히 적어 올리면서, 저 역시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세상의 속도를 쫓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해 처음부터 포기해 버린 사람인데 말이죠. 화려하게 변하는 패션의 세계를 글로 옮기면서도, 문득 모니터 앞의 저는 늘 똑같은 옷을 입고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느리고 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조금 꺼내어보자면, 저는 옷의 질감이나 소재를 기가 막히게 구별해 내는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잘 다루지 않는 낯선 이미지들을 고르는 데 약간의 흥미가 있었을 뿐입니다. 화면 속 착장 이미지들을 보며 분위기를 짐작하고, 여기저기서 흩어진 정보들(때로는 편리한 기술의 힘을 빌려)을 모아 그럴싸한 지식으로 엮어냈습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사실 저는 패션이라는 '가장 빠른 세계'를 제 방의 낡은 의자에 앉아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훔쳐보던 철저한 관찰자였습니다.
화면 속 패션 트렌드는 빛의 속도로 바뀌지만, 그것이 현실의 제 옷장으로 들어오고 제 피부에 닿는 속도는 한없이 느리거나 아예 멈춰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면과 따뜻한 니트가 주는 안락함을 글로 쓰면서도 정작 제 손끝은 마우스의 차가운 플라스틱 촉감만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내가 아는 지식과 실제 내 삶 사이의 이 엄청난 '속도의 시차'가 퍽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적으며 누군가에게 "올해는 이런 스타일을 시도해 보세요"라고 제안하는 것이 스스로 낯간지럽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간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트렌드를 몸에 걸치고 유행의 속도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저처럼 화려하고 빠른 패션의 세계를,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소설책을 읽듯 아주 멀리서 천천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으니까요. 저는 패션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와 텍스트로 '읽어내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가짜 지식이 아니라, 빠르고 시끄러운 세상을 저만의 안전한 거리에서 즐기는 아주 조용하고 느린 독서법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세상의 빠른 트렌드들을 보며, 마치 나만 뒤처진 것 같은 묘한 조급함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해서 나의 걷는 속도까지 억지로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창밖의 화려한 유행은 그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볍게 감상하시고,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조용하고 느린 방 안의 온도에 온전히 만족하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